웃음 등대
내가 저지른 황당한 실수 본문
오랜만에 우리 건물 옥상에 올라갔어요.
추운 겨울날씨인데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어요.
마눌님이 빨래 좀 널어 달라고 해서 함께 올라 갔었지요.
빨래를 다 널어 놓고 옥상을 한 바퀴 휘~ 둘러 보았어요.
영역에 대한 무의식적인 본능이었겠지요. 동물의 왕국에서 호랑이가 영역표시하듯
무심코 에어컨 실외기 놓여 있는 쪽을 보게 되었어요.
뭐 일부러 보려고 한것은 아니지만 한바퀴 살펴본거지요.
그런데 에어컨 실외기 한 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거예요. 철거된 상태였어요.
가만있자, 그 자리에 우리 에어컨 실외기가 있었던것 같은데......
순간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
마눌님께 동의를 구해봤지요.
"여보 여기 이자리에 우리 에어컨 실외기가 있지 않았었나요?"
분명 내 뇌세포들은 그 자리에 우리 에어컨 실외기가 있었다고 계속 우겨대고 있었어요.
때마침 마눌님도 내 기억이 맞는것 같다고 동의해줘서 에어컨 실외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어요.
뜨아 !!!!! 럴수 럴수 이럴수가?
누가 감히 우리 에어컨 실외기를 몰래 떼어갔단 말인가?
침착하자!!! 릴렉스......우선 흥분된 마음을 진정하고 차근차근 추리를 해보자.
뇌리를 스치는 예리한 추리력은 최근에 이사간 아랫집을 생각나게 했어요.
아마 이사하면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에어컨 실외기 위치를 착각해서 우리 꺼를 잘못 떼어갔을지 몰라.
그렇지만 만에 하나 내 기억이 잘못일 수 있으니, 에어컨을 켜 봐서 실외기의 작동여부를 알아보기로 했어요.
집으로 가서 에어컨을 켜고서 옥상으로 확인하러 올라가 봤지만 실외기 돌아가는게 보이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우리 에어컨 실외기가 없어진 사실이 확실하게 증명된거죠.
우선 우리 건물 총무님께 전화를 드려 이사간 이웃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곧 바로 전화를 걸었어요.
모르는 번호일텐데 다행히 전화를 받더군요.
그리고 나의 신분을 밝힌 후에 다짜고짜 우리 에어컨 실외기가 없어졌는데,
혹시 이사할 때 에어컨 실외기를 잘못 가져가신게 아니냐고 물었지요.
상대방은 흠칫 놀라는 듯 하더니 이삿짐을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고 에어컨 실외기도 확인해 보지 않아서,
이삿짐센터에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해 주겠다고 했어요.
잠시 후 이사갔던 이웃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우선 죄송하게 되었다고 사과하면서 이삿짐센터 사장에게 단단히 따지고, 원래대로 원상복구 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본인이 확인차 현장에 와보겠다고 했어요.
한 건 했어요!!!
범인도 잡았고 해결방법도 실마리를 찾았으니까 일단 안심이 되었지요.
총무님께 전화번호 알려줘 고맙다고 하고, 일이 원만하게 잘 처리 될거라고 말씀드렸죠.
잠시 후 이삿짐센터 사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확실한 것은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지만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우선 사과하고, 확인 후에 오후에 원상복귀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나의 침착한 일처리에 일이 일사천리로 마무리 되어 가는것 같아 흐뭇해 하고 있었어요.
30분이 지났을까, 이사갔던 이웃이 현장에 도착했고 동행을 요청해서 옥상에 다시 올라갔지요.
사건의 주도권을 쥐게 된 나는 자신있게 상황을 설명하며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듣길 원하고 있던 즈음,
이사갔던 이웃은 분명히 자기네 실외기를 떼어 간 것 같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서서히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은 뭘까요?
에어컨 실외기는 우리꺼랑 상대방 제품의 회사명이 일치했어요.
그런데 우리 에어컨 실외기보다 자기네 에어컨 실외기는 모델이 2-IN-1 이어서 용량이 더 크다고 하는거예요.
워낙 자신있게 주장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 순간 멘붕이 오기 시작했어요.
급기야 마지막 대응으로 다시 한 번 에어컨을 가동시켜 보기로 했어요.
나는 먼저 옥상에서 내려가고 그 사람은 옥상에 남아 실외기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어요.
우리집에 들어가 에어컨을 켤 때 까지도 내겐 자신감이 남아 있었어요.
아까는 분명 에어컨 실외기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에어컨에서 찬바람이 나오기 시작하고 10초가 지났을 무렵 옥상에서 걸려온 전화는 "실외기 돌아가는데요" 였어요.
! ! ! ! ! !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어요.
그 사람이 가르키는 실외기는 분명히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어요.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아까 확인했을 때는 분명 안 돌아갔었는데 왜 지금에서야 돌아가는 거야.
이제 사건의 전말을 밝힐 때가 되었나봐요.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우리 에어컨 실외기의 위치가 잘못 되었던거였어요.
우리 에어컨 실외기는 처음부터 다른 위치에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건만,
잘못된 내 기억이 이 모든 사건을 저지르게 된거였어요.
어떡하지 나!!
난데없이 이사갔던 사람 불러 세워 놓고 "내 에어컨 실외기 내놔!" 했으니
그리고 또 이삿짐센터 사장님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봉변을 당하게 하고......
멘붕이야! 멘붕이야!
이사갔던 이웃에게 여러차례 허리를 굽혀 가며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휴일 아침 황당한 전화에 당황했을 당사자들을 생각하니 그저 죄송할 뿐......
물론 우리 건물 총무님께도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오해 없으시길 당부하고......
그런데도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웃음이 터지는 것은 웬일일까요.
킥킥킥~
"너의 기억을 100% 믿지 말지어다"
'개인 창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송된 카톡 문자 되돌리기 (0) | 2013.08.28 |
---|---|
자전거와 배구 네트 (0) | 2013.08.13 |
말장난 (0) | 2007.08.25 |
낙서 (0) | 2007.07.29 |
야생 오리 포획법 (0) | 2007.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