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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녀 실제 사진

웃음관리자 2007. 5. 14. 09:37

 

 


노래와  웃음은 팔지언정 평생지조를 팔지않는다는
몸은 천민 이지만 머리는 양반이라는그네들은 한시대의 멋과 풍미를 알았다
남자들은 풍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대했으나 그들은 온몸으로 삶을 승화하였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일명 해어화라고도 불렀다
상류고관이나 한학적 교향이 높은 유생들을 상대하다보니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기생은 술자리의 시중을 드는 것이 적어도 겉으로 나타난 업무이다.
기생은 천민출신이지만 상대하는 남성들은 고관대작이나 상류층 인사들이기 때문에
이들과 맞상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훈련을 거친다.
춤과 노래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고
서화도 잘 그려야 하며 또 시도 잘 지어야 하고 학식도 있어야 한다.
또한 말씨도 고상한 것을 골라 써야 하며 행동도 교양있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훈련은 몇년에 걸친 장기간의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양 정도에 따라 "명기"로 알려진 초일류 기생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이름난 문인"도 있으며 "유명한 화가"가 있고 "명창" 그리고 "명연주자"도 있다.
명기는 또한 지조가 있고 정조관념이 강해서 상대하는 남성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류나 멋이 없는 사람은 상대를 꺼리고 때로는 기지를 발휘하여 골탕을 먹이곤 하였다.
그러나 풍류를 알고 인품이 훌륭하여 상대할 가치가 있으면 돈이 없어도 이쪽에서 접근하여
교류를 하며 때로는 장래성 있는 젊은이의 뒷바라지도 하였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기생을 "의기"라고 한다.
일제 때에 "항일기생"들이 많았다.
진주 기생으로 명월관에 드나들던 "산홍"에게 친일파 이모가 당시 거금 1만원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였으나 산홍은 돈을 보고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춘외춘"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으로부터 배일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면서 돈 한뭉치 주는 것을 뿌리친 일이 있었다.

 
 
또한 위와 같은 개인적인 애국행위 말고도 집단적인 애국행위도 있었다.
기생조합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19년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은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에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검진을 거부하고 다시 경찰서 앞에 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는 헤어졌다.
주모자 되는 기생이름은 "김향화"인데 그후 그녀는 6개월의 언도를 받았다
 
 
"동기"란 기생교육을 받는 10세 안팎의 어린 기생을 말한다.
이 동기가 교양을 쌓고 기생이 되기 위한 수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이가 15, 16세가 되면 남자를 받게 되는데 처음 이 동기와
동침하는 남자는 "머리를 얹어준다"라는 표현을 쓴다.
즉 초야권(첫날밤)을 얻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패션을 이끌었던 기생의 일면을 엿보게 해주는 한 기생의 모습

 

20세기 초반의 기생 왕수복, 소설가 이효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왕수복은 당대의 대중적인 스타였다.

 


남보라색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고 숄을 걸친 기생 김농주. 당시 유행했던 옷과 화장법을 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기생 오산월과 김산호주

20세기 초반의 기생과 악사들

 

항장무(項莊舞)를 추는 기생들

 

평양 기생학교의 시조창 수업 장면

 

덕수궁 중화전 앞의 관기와 관인

대한제국 시절 궁중의 연회를 마친 기녀들과 관인들이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무용을 선보이고 있는 한 기생의 모습

 

20세기 초반 기생이었던 노옥화, 윤농월, 이난향, 이화향

 

평양기생학교의 레뷰댄스. 레뷰댄스는 1913년 일본 천승곡예단이 들여와서 1920년대 기생의 레퍼토리로 흡수됐다.

 

기생과 악사들. 1907년 이전에 찍은 사진으로 ‘살풀이춤’을 담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생은 나라의 경사, 궁중의 큰 행사, 연회 등에서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은 한 이들은 고대부터 존재했고 그 맥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계속 이어졌다.
 
기생을 기녀(妓女), 여기(女妓), 여악(女樂)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의 기생들은 주로 관기(官妓, 관에 속한 기생)였는데, 일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재조직되어 1908년 관기가 해체되고 기생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일본식 권번 기생으로 변모하게 된다.

기생들은 20세기 초반의 엽서 및 광고를 통해 조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관광자료로 홍보되었는데, 특히 무용수, 악기 연주자, 풍광 속의 미녀 등으로 연출되어 ‘조선풍속’이라는 제목으로써 특히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풍속 관련 사진엽서는 일본의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다이쇼[大正] 사진공예소 등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하에서 기생들은 궁중무 등 전통 공연예술의 맥을 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이 같은 전통 공연예술 외에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춤을 개발하는 등 한국 전통 공연 무용을 근대적으로 소화, 개발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기생들은 전통무용 뿐 아니라 서양의 댄스공연도 수용 소화시켜 서구식 무용 공연을 활성화시키는데 한 몫을 하였다. 기생은 무대 위 공연 외에도 각종 공적인 연회, 박람회, 운동회, 자선 연주회 등 민간의 여러 잔치에도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런 가운데 기생으로서 가수 등으로 진출하여 대중 스타로 거듭나게 된 이들도 있었다.

미모에 기예를 갖춘 전문 예술인으로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기생들은 20세기 근대 문화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였다. 바로 패션이었다. 기생들은 서양의 신문물 패션으로 상징되는 양산, 스카프, 핸드백 등 소품과 액세서리들을 한복과 연출하여 자신을 꾸밀 줄 알았고, 이러한 연출 방식들은 새롭게 당시의 유행을 이끌었다. 기생들은 이렇게 패션 리더로서 주목받기도 하였다.

 

기생학교(1945년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