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등대

추억의 스타 정훈희 본문

☆ 웃음관리자 ☆/잡동사니

추억의 스타 정훈희

웃음관리자 2012. 11. 20. 08:59

 



정훈희는~

1933년 대구에서 열린 OK레코드 콩쿠르 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피아니스트이자 가수인 부친 정근수씨의

5남1녀중 외동딸로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다

 

1964년 2월 부산 미아초등학교를 졸업한다

(참고로 초등학교때 정훈희는 배구부 주장을 했다)

1967년 2월 부산여중을 졸업한다

3월 부산여상에 입학한다

7월 방학때 서울로 놀러온 정훈희는~

나이트클럽 악단장이던 작은아버지 정도근씨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그랜드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다 작곡가 이봉조의 눈에 띠게된다

"쪼매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라며 자신의 색스폰 연주곡으로

취입한 "안개"의 LP를 정훈희에게 주며 멜로디를 익히게 하는 동시에

당시 mbc라디오 박진현 음악PD에게 가사를 부탁해 급하게 곡을 완성시킨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훈희의 데모음반은 방송3사에 보내졌고

mbc라디오를 통해서 첫전파를 탄 정훈희의 "안개"는 그날부터 신청곡 요청이

쇄도하게 되면서 이례적으로 방송국PD들이 정훈희 음반취입을 재촉하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반응에 정훈희는 "안개" "숙명" "별아 내가슴에"등

총5곡을 급하게 녹음해 컴필레이션 형식의 데뷔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 데뷔앨범은 발매 즉시 발매 재발매를 거듭하며

당시로는 40만장이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대히트를 치게된다

또한 그해 10월에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안개>에서

여주인공인 윤정희가 정훈희의 "안개"를 립싱크하며 안개 신드롬을 일으킨다

(참고로 영화 <안개>는 김수용감독 신성일,윤정희 주연의 영화로

아카데미극장 관객집계만 103,600명 전국 10만명을 기록하며 대종상을 포함

윤정희의 신인상,김수용감독의 감독상등 그해 모든 영화상을 휩쓸게 된다)

12월 이로인해 정훈희는 데뷔 4개월만에 서울신문의 무궁화상,국제신보,

영남일보의 신인상 그리고 대구, 대전 MBC 10대가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1968년 2월 홍현걸 작곡의 "강건너 등불"을 발표한다

9월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4회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수상한다

이무렵 정훈희는 "돌아가는 삼각지"로 최고의 인기를 끌고있던 배호와의

핑크빛 염문설로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며 혹독한 유명세를 치루게 된다

 


1970년 11월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 참가해 "안개"를 열창해

국내 가수로는 최초로 월드 베스트10에 입상을 하게 된다

(참고로 당시 동경가요제는 이탈리아의 <산 레모>음악제와 맞먹는

규모로 전세계 72개국에서 580여곡이 응모하였으며 예선을 거쳐

결선에 오른 40곡이 11/21부터 11/23일까지 3일간에 걸쳐 진행 되었다

이스라엘의 [햇바]양과 [데비드]군의 듀엣곡 "나는 나오미를 꿈꾼다"가

최우수곡으로 "눈물"을 부른 일본의 [유끼무라 이즈미]양이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하며 상금 삼천달러를 받는 영광을 얻게된다)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이대회에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혼성보컬 그룹

ABBA가 참가해 비록 데뷔초기지만 입상권에 들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물론 <ABBA>란 이름으로 출전한것은 아니지만

비욘과 베니는 "Santa Rose"라는 노래로 참가했고

아그니타와 프리다는 백보컬로 무대에 함께 오르게 된다

(참고로 ABBA가 그룹 정식명칭으로 사용된것은 73년 3월부터 이다)

12월 전 서울시장인 김현옥의 장남인 김구와 열애설 결혼설등으로 인해

정훈희의 은퇴설이 당시 큰화제가 됐으나 이또한 해프닝으로 끝나게 된다

 


1971년 정훈희는 국내영화 최초의 하드 보일드 영화인 박종호 감독의 <들개>에

출연하여 신성일과 함께 섹스와 폭력을 담은 대담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 영화는 대만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12월 25일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으로 오빠들과 7인조 캄보밴드를 결성하고

마련한 300만원 상당의 전자오르간,앰프기타,바이올린,섹스폰등 악기들을

21층 나이트클럽에 보관하고 있다가 이화재로 안타깝게 모두 소실하게 된다


1972년 4월 "꽃길"과 "빗속의 여인들"을 발표하여 연이은 히트를 하게된다

7월 제5회 그리스 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이봉조 작곡의 "너"를 불러

인기상과 함께 아시아 가수로는 유일하게 4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10월 제3회 동경가요제에 참가해 이봉조 작곡의 "좋아서 만났지"를 불러

정훈희는 특별가수상을 그리고 이봉조는 작곡가상을 동반 수상하게 된다

11월 정훈희는 일본 야마하 음악재단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1974년 당시 일본에서 하니준이란 예명으로 활동중이던 정훈희는

2년전 월드컵 나이트쇼에서 만난 재벌2세인 4살연상 한영복씨와

그해 5월하순 일본에서 귀국하여 결혼한다는 설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역시 해프닝으로 끝났고 5월 귀국한 정훈희는

그해 8월 2년만에 이봉조와 재회하며 제2의 음악인생이 시작된다


1975년 2월 칠레 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무인도"를 부른 정훈희는

가수부분에서 최우수 인기상을 수상하게 되고

작품부분에선 "무인도"가 3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참고로 정훈희는 현지에서 장출혈과 신경쇠약 증세로 입원을 하여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이 화환을 보내 화제가 되기도 한다)

7월 도봉구 삼미극장 분장실에서 정훈희를 짝사랑하던? 현철원이란

(한달전 예산에서 올라온)시골청년이 정훈희를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다 이를 거절 당하자 분장실로 뛰쳐 들어와 콘크리트 조각으로

정훈희 얼굴을 때려 부상을 입고 고려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6년1월 대마초흡연 연예인 54명에 대한 명단이 공개된다

윤형주,김추자,신중현,이장희,이종용,박광수등은 구속되고

이상한,이상해,장현,박인수,이현등은 불구속 되고

정훈희,임희숙,이수미,임창제등은 훈방조치되어 풀려난다

특히 훈방조치된 정훈희등 10명은 3개월간 방송출연 금지조치를 내린다

하지만 3개월간의 금지조치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이들은 재기를 못하게 된다


1977년 5월 대마초사건으로 집에만 박혀있던 정훈희는 미군위문공연에 나선다


1978년 3월 대마초사건으로 모든 영리활동이 금지 되었던 정훈희는

밤무대등 일부 활동이 풀리면서 업소인 <월드컵>에 출연하게 된다


1979년 4월 대마초건으로 TV라디오는 물론 레코드 취입마저 일절 못하고 있던

정훈희가 TBC-TV에 칠레국제가요제 실황장면이 잠시 보이며 정훈희를

비롯해 대마초사건으로 활동이 묶여있는 연예인들에게 희망을 주게된다

11월 김추자,김세환,김도향,윤형주,이장희,조용필,정훈희,전유성,신중현등

대마초사건 연루 연예인들은 75년이후 4년여만에 재기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해 60년대 부산시장을 거쳐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70년대초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불도우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의 아들이자

<라스트찬스>출신의 보컬리스트 김태화와 약혼후 동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후 양가 부모의 반대와 성격차등으로 인하여 헤어지게 된다


1980년 8월 TV라디오 5개사는 방송자율정화 차원에서 방송 부적격자로 선정된

이주일,심수봉,정훈희,배삼룡,이기동,나훈아,태진아,옥희등 연예인 25명의

영화출연,레코드취입,유흥업소출연등을 제외한 모든 방송출연을 금지 시킨다

이로 정훈희는 4년만에 대마초사건으로 풀렸다가 또 다시 방송금지조치 된다

출연금지조치는 81년1월 심수봉,이기동,태진아를 제외하고 모두 풀린다

 

 

1981년 11월<KBS 세계가요제>에서 "너의 목소리"를 불러 동상을 차지한다

(참고로 대상은 "어쩔수 없어요"를 부른 미국의 [새미 조 콜]이

금상은 "사랑의 멜로디"를 부른 이탈리아의 [토니 달라라]가

그리고 정훈희,이은하,김태곤등 5명이 참가한 한국은

이은하가 우수 가창상을 수상할뿐 본상은 유일하게 정훈희만이

동상을 수상하게 되어 주최국으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게 된다)


1983년 김태화와 재결합한 정훈희는 큰아들인 대한이(김유진)을 낳고 혼인식을 올린다

(참고로 결혼식은 1985년 가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1986년 4월 남편인 김태화가 히로뽕을 상습적으로 복용한 혐의로 구속된다


1989년 둘째 아들인 민국이(김진성)를 임신한 상태에서

녹음작업에 들어가 그해 3월 "우리는 하나"를 발표하게 된다

당시 정훈희는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고통을 받고 있던 시기였고

헤어짐과 자살등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2001년 조카 제이와 그룹 히식스 멤버였던 오빠 정희택씨 그리고 두 아들이

모두함께 참여하며 정훈희 가족 모두 함께한 앨범 ‘행가(幸家)’를 만들게 된다

 


2005년 가수들의 권익을 정식으로 대변할 단체가 없다고 느낀 정훈희는

가수협회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참여를 요청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게되자 정훈희가 전면에 나서

1달만에 1억6천만원이라는 거액의 찬조금을 모으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후 정훈희는 가수협회 이사로 활동하게 된다

참고로 가수협회는 2007년 3월 정식으로 사단법인에 등록하게 된다


2009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라디오 <정훈희의 가요쇼>를 2010년까지 진행한다

 

현재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훈희는

기장읍 문화예술회장도 맡으며 지역 문화발전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또한 정훈희는 주말마다 남편이 운영하는 부산 기장군의

라이브카페인 <정훈희의 꽃밭에서>에서 노래로 팬들을 만나고 있다

 


정훈희는 67년 데뷔후 어느덧 가수인생 45년이라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전성기였던 75년부터 81년까지 무려 6년간 방송활동이 금지된것을 포함해

실제로 그녀가 정상적인 가수활동을 할수있던 시기는 10년 남짓에 불과하다

정훈희처럼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좀 더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하길 바래본다

 

 


정훈희의 가족관계로는

남편 김태화(62)와 김유진(29)와 김진성(23) 두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