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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쓰는 엽서

웃음관리자 2006. 10. 11. 22:14
가을 엽서

별은 내 가슴에


1.


파아란 하늘 서랍을 열고
엽서 한 장 꺼냅니다

당신께 드리고자 아껴왔던 말들
서투른 글씨로 깨어납니다

손끝 닿는 곳마다 쪽빛이 물들고
한켠에선 풀꽃이 소담히 피고
향기따라 드문드문 귀뚜라미 웁니다

당신께 드리고자 지켜왔던 말들은
온통 가을입니다.



별은 내 가슴에

2.


가을이 내민 아릿한 이 슬픔을
차마 사랑이라 말할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하지 못합니다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냅니다

사랑은 이 가을처럼
조용히 익어 가는 것들과
쓸쓸히 저물어 가는 모든 것들을
견뎌야 함을 당신만은 아실런지요.



별은 내 가슴에

3.


무심코 계단에 나지막히 놓아둔
백일홍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유난히 비만 내리던 밤에 대해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하여
그리움에 시달려야 했던 밤에 대해
침묵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을 만났던 지난 여름,
내 가슴에 달아주신 햇살을 기억합니다

몇 차례 폭풍에도 쓰러질 수 없었기에
그 여름 끝에서 살아남은 늦깎이 붉은꽃
이제야 당신 향해 활짝 웃고 있습니다.



별은 내 가슴에

4.


감나무가지 사이로 아슴아슴 보이는
하늘 한 조각 떼어 내 마음을 드릴까요

윤이 나는 햇살 받아 탐스러운
홍시 따다 달콤한 입맞춤을 드릴까요

순식간에 주홍빛으로 번진 이파리 주워
홧홧 불타듯 뜨거운 사랑을 드릴까요

모습 안으로 감추고 저 혼자 의지를 내
튼튼한 밑둥과 긴 가지를 오르게 하는
이 가을 지나 겨울, 이듬해 봄이 와도
변함 없을 뿌리깊은 사랑을 드릴게요.



별은 내 가슴에

5.


가을비 내리는 저녁
홀로 숲길을 산책하는데
누군가 꼭 뒤를 따라 오는 것 같습니다

찰박 찰박 당신 발소리일까 돌아봅니다
당신 그림자 내 등에 안고 있는 까닭일까요
그리움 한줄기 내 뺨에 톡 하고 떨어집니다.


별은 내 가슴에

6.


추억도 없이 어찌 별이 뜨고 달이 찰까요
언젠가 당신과 왔던 바다 모퉁이에 세워진
해월정(海月亭)에서 이 엽서를 씁니다

둥글게 찬 보름달을 전망하느라
측백나무 분주히 까치발을 세우는데
내 눈 속에 스민 달은
편하고 따스한 당신 얼굴로 보입니다

이 사람,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 사람만큼 나를 나답게 해줄 이 또 있을까!
충만을 느끼게 해주는 당신임을 고백합니다.



별은 내 가슴에

7.


가을에는 나무 하나 꽃이름 하나
풀벌레 노랫소리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게 없습니다

당신이 계신 동네에도
꽃이 피고 먹감이 익어가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당신 촉촉이 젖은 눈에도 걸려있겠지요.

당신이 계신 동네에도
풀잎을 사각이며 노니는 벌레가 살고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노래가
당신 귀에서도 속삭이고 있겠지요
이 오묘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노래가.



별은 내 가슴에

8.


당신을 만나고 헤어질 땐
눈물이 핑 돕니다
안녕하며 손 흔드는 길목에 서면
어김없이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서둘러 눈물을 감춥니다
당신이 따뜻하다면 난 오래도록
추워도 좋겠습니다

당신의 모든 걸 가질 수 없는
슬픔의 일부가
내 눈물로 녹고 있습니다

당신이 따뜻하다면 난 오래도록
추워도 정말 좋겠습니다.



별은 내 가슴에

9.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입니다

까마득한 높이에 맺힌
별이 한 웅큼
내게로 와 안깁니다

가을밤이 쏟아내는 쓸쓸함에
쓸쓸할 틈 없이
당신 안에 평온히 잠이 듭니다.



별은 내 가슴에


10.


어제 우리가 같이 걷던 길에
노오란 단풍이 참 예뻤지요

우리가 손을 잡고 같은 것을 바라보며
같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 인지요

대화가 없었어도
당신에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편안한 행복뿐이었지요

어느 때부터 별달리 대화가 없어도
오히려 더 깊은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을
당신도 아시는 까닭이겠지요.

굳은 것이 가을 햇볕에 익고 익어
녹실녹실 해 지듯이
우리의 사랑도 
고요히 무르고 있는 까닭이겠지요.



별은 내 가슴에

11.


바람이 이는 가을 저녁,
당신의 귀가 길은 어땠나요
발걸음이 바람소리에 휘휘 감겨
힘겹지 않았기를

쓰러지는 저녁 어스름에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을 보았나요
뜻밖에 우연히라도 가슴이 아리지 않았기를
등불들은 다만 따뜻했기를.



별은 내 가슴에

12.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떨어집니다
내 안에 비어있는 조금만 귀퉁이까지
떨려옵니다

이런 날은 따뜻한 그 무엇이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눈을 감고 따뜻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눈을 감고 당신을 그립니다

거친 바람을 막아주는 당신의 등,
내 손을 감싸는 당신의 손,
내 이름을 불러주는 당신의 목소리,
당신만의 좋은 냄새......

그러고 보면 따뜻한 것들을 참 많이
소유한 고마운 당신입니다.



별은 내 가슴에

13.


바람이 부르면
제 가진 잎 모두 쏟아 놓는
시월의 나무처럼

내가 가진
사랑이라는 사랑
죄다 쏟아 놓을게요
당신께서 부르시면...



별은 내 가슴에

14.


가끔 내 안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옵니다
낙엽이 쏟아지고 새들이 떠나는 탓일까요
가지 않겠다던 약속, 그 믿어지던 기대가
요란하게 무너지는 탓일까요

아마도 당신이 없었다면
나 얼마나 정처 없이 떠돌까요
혹 싸늘한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나 얼마나 몸서리칠까요

바람이 사면에서 가지를 흔들어도
하나 남은 사랑,
당신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별은 내 가슴에

15.


바람 속에는 찬 기운이 머금어져 있습니다
달맞이 언덕 숲길도
겨울 쪽으로 야위어가고 있습니다

풍성했던 잎들을 떨구는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요
떨군 잎들 그득그득 뿌리에 덮어 겨울을 예비하는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겸허한 풍경을 닮았는지...
숭고한 이별의 때를 두려워 않는 우리에게 내려진
사랑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깊은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詩 인애란

시 월의 어느 멋진 날에 - 김동규.금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