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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聖 허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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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허준
선생(1546~1615)은 조선 중기의 의인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이며 김포출신이십니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윤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내셨으나
선생은 서자(庶子) 출신이었기에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에 있으면서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을 높였는데
사료로 보는 선생의 이미지는 의사라기보다는
의학자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듯 합니다.
<지봉유설>에서는 선생을
'매우 똑똑하고 재기가 넘치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의서 이외에도 경서와 사서에도 능통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동의보감
1596년에 선생은 선조대왕의 명으로 양예수, 정예남,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으나
그 다음해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일 또한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선조대왕은 선생에게 단독으로 의서편집의 일을 맡기셨는데,
선생은 어의로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 일에 전심하여
10여년 만인 1610년(광해군 2년)에
25권, 25책의<동의보감>을 완성하셨습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명민한 관찰력,
고전에 대한 해박한 학식을 토대로 풍부한 임상경험을 살려
보다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의술의 구체화를 이룩한 <동의보감>은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총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시 동양의학 전체를 간편하게 종합해 정리한 의학 백과로서
무엇보다도 동양의학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을
훨씬 능가하는 획기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동의보감은 백성을 보호해주는 신선의 경전이요,
의사들의 비법을 담은 문서' 라고 극찬을 했으며
편찬 당시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앞 다투어 발행되었고
20세기 들어서는 독일에서도 번역출판 되었고 영역본으로도 간행됨으로서
세계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 우수성을 대변해 주는 또 하나의 예는
지난 1995년에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장쩌민 주석이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간의 오랜 우호관계를 예로 들면서
"우리 양국은 2천 여 년 전부터 왕래를 시작한 이래
17세기에 편집된 동의보감은
우리 양국 문화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한 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동의보감>은
우리나라의 전통의학 모두가
〈동의보감〉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흘러나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의서입니다.
무엇보다〈동의보감〉의 가장 커다란 위대성은
기존의 의학전통을 집약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복잡다단한 모습을 띠고 있던 당시 동아시아 의학계의 혼란을 바로 잡아
이후 의학전통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외과적 치료술
동의보감의 첫 페이지는 인체해부도로서
인체의 장기와 각각의 특징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몸 안의 오장육부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거의 정확하여
해부를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실제로 찾아보니 매달린 박같이 생겼다고 묘사한 쓸개에 대한 관찰은
현대의학에 비추어 봐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더군요.
또 동의보감엔 상당한 수준의 외과적인 치료술도 담겨있는데
당시 선생은 인체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탕약을 짓고 침이나 놓을 것 같은 한방 의학서라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복부가 파열되었을 때의 수술법인 장두상지법은
"뱃가죽 파열로 장이 밖으로 나왔을 때,
삼이나 상백피로 실을 만들어 화예석을 바르고 봉합한다."로 설명되어 있는데요,
요즘같은 시대에도 큰 수술에 해당하는 외과 처치법으로서
외과적인 봉합을 할 땐 뽕나무 껍질로 만든 상백피실을 쓰며
진통제, 마취제 효과를 내는 초오산으로 마취를 시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극약에 가까울만큼 독성이 강한 약재인 초오와 다른 약재들을 섞어
마취제인 초오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수술을 끝낸 후엔 소금물을 복용시켜 깨어나게 했다고 합니다...
스승 유의태
선생에게는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내준 한 스승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경상도 산청의 유의태 선생으로서
그로 인해 선생은 의학적인 완성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엄격한 유교사회로서
우리의 전통의식에 비추어보면 당시로선 사람의 몸을 해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의학적인 대의와 제자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스승의 큰 뜻이라곤 하지만,
과연 선생은 당시 우리 사회의 윤리나 정서에 상관없이
스승을 해부할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지금껏 여러 논란이 있어왔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설이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인체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근대 서양의학이 도입되기까진 모든 외과수술은 한방에서 담당해야만 했지요.
선조 조에 이르러 임진왜란 등 왜구와의 잦은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치료해야 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외과술도 장족의 발전을 해 왔을 터,
결국 선생도 이런 가운데에서 인체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외과술을 익혔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게다가 의자(醫者)로서의 탁월한 선생의 자질이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민중의 의자(醫者)
선생은 결코 소외된 일반 민중을 잊지 않았습니다.
동의보감의 탕액편을 보면
650여 가지의 약재 이름이 한글로 나란히 적혀있습니다.
또 동의보감에서 처방하는 주요약재의 90%가 향약으로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약재들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쓰는 약재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당약들로서
일반 민중들은 약 한첩 제대로 먹기가 어려울 정도로 무척 비쌌다고 합니다.
이런 형편을 잘 아는 선생은 과감하게
한 가지 약재를 써서 치료하는 단방처방을 내렸는 바,
고급약재 수 십 가지를 섞어 짓는 약에 비하면
자연히 약의 효능이란 측면에선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바로 민중들을 생각하는 선생의 정신이 가장 잘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선생은
약과 의원이 양반이나 사대부 등 특권층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시절,
약에서 소외된 채 죽어가는 병든 백성들을 살리고
또 우리 산과 들의 이름없는 야생초들도 비로소
합당한 약재로서의 이름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예방의학사상
또 하나 선생의 위대한 점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고
약과 침은 그 다음"이라는 선진적인 의학사상을 강조했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선생의 진보적 의학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마음과 몸을 단련하고 수양을 잘하면
병을 미리 막아 오래 살 수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병의 치료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일단 병이 생긴 다음에는 제때에 치료하여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선생은 저서에서 정상적인 생체의 생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쓰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다음
질병의 병리적 메커니즘과 증상 및 치료 처방과 예후에 대하여 썼으며
끝으로 해당 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 단방문들과 침구법을 밝히는
독특한 서술체계를 세웠습니다.
이는 오늘날 현대 선진의학이 지향하는 바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글 의서(醫書)
또 그 당시 의서는 특권층의 것이었습니다.
결코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그런 민중들을 위해 많은 한글 언해본 의서들을 간행함으로서,
백성들도 쉽게 의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지요.
서민이 보기에 난해한 고양생 著 <찬도맥결>을 교정,
<찬도방론맥결집성> 4권으로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고
<구급방>을 <언해구급방>으로,
임원준의 <창진집>을 <두창집요>로 이름을 바꾸는 등,
많은 의방서를 증보 또는 개편하여 알기 쉬운 한글로 해석, 간행하셨습니다.
조선시대에 선생보다 의서를 많이 편찬한 인물은 없다할 정도로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 선생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해 주셨지요.
어려서 서자로 자랐기에 민중의 고통을 체험했고,
그 후로도 늘 고통받는 가난한 민중들의 입장에서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알았던 선생의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허준의 의학정신... 그 바탕은 바로 애민(愛民)이었습니다.
끝으로 행곡(杏谷) 최형주(한의사)님의 글을 약(略)해서 올려드리는 것으로
허준선생과 <동의보감>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룰까 합니다.
21세기는 한의학(韓醫學)이 세계의학으로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의사(漢醫師)였다.
나 역시 선대(先代)와 더불어 3대에 걸쳐 약초와 침술을 이용,
질병으로 고생하는 숱한 환자들을 돌봐 왔다.
그러나 나는 한의사(漢醫師)가 아니라
한의사(韓醫師)라는 점이 그분들과 다르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혹자는 '한(漢)이나 한(韓)의 차이가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나는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서양에서는 한의(漢醫)를 'Chinese Doctor(중국의사)'라 부른다.
중국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머지않아 한의(韓醫), 즉 'Korean Doctor(한국의사)'가
동양의학의 선두주자가 되어야 하고,
점차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애국적·국수주의적 소치에서가 아니라,
한의학의 '뿌리'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의학(漢醫學)은 중국 한나라 때 융성했던 의학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선 조선 선조 때 의성(醫聖) 허준(許俊)이
당시 중국에서 난립하고 있던 8천여 권의 한의학 관련 잡서(雜書)들을 정리,
'동양의학의 금자탑'이랄 수 있는 <동의보감>을 완성한다.
동의학(東醫學)의 진단과 처방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서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허준선생이 동양의학의 거대한 체계를 일단 완성한 셈이다.
사실 이 때부터 한의학(漢醫學)의 맥이
우리나라로 건너오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이 바로 이제부터라도 동의학이,
한의학(漢醫學)이 아닌 한의학(韓醫學)으로 불려져야 할 명백한 이유인 것이다.
21세기는 한의학(韓醫學)이 세계의학으로 웅비할 시기로서
허준 선생의 애민사상을 본받아
인류의 숙원인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데
우리 한의학(韓醫學)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 자료참조 : 한국건강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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